마음을 다스리는 100가지 명상(2) > 스님과의 대화

검색하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소통Odae mountain Woljeongsa

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스님과의 대화

스님과의 대화

마음을 다스리는 100가지 명상(2)


페이지 정보

작성자 문수동자 (121.♡.203.118) 작성일08-11-12 18:35 조회6,403회 댓글0건

본문

2장 지혜의 문 * 역경은 삶에 강력한 활력을 제공합니다. 빚을 진 덕분에 일이 잘 되어 사회에 유익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빚도 일종의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차이는 그것을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가 못하는가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뛰어난 분별력을 포함하며 양심이다.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방법 혹은 체계를 띠어야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지식의 최고 단계인 과학도 '인류와 그 호나겨을 위하여'라는 식의 허풍을 떨지 않아도 가까운 문제로부터 유익하게 쓰려면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20세기는 물질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정신문명은 치명적으로 후퇴한 시기입니다. 과학의 발달은 인류에게 회기적인 편리성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것이 행복을 가능케 한 큰 요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인류는 과학이 발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어느새 과학 그 자체를 목적화하고 말았습니다. 과학이 신을 대산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과학은 과학 그 자체를 위하여 발달한다고 하는 이기주의의 극치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지금보다 백 배 더 발달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핵을 개발해 미사일을 쏘며 서로 싸울 것입니다. 아무리 치밀한 컴퓨터를 개발하더라도 핵발사단추를 컴퓨터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누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원숭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핵발사단추를 누르더라도 미사일은 발사돼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지식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실은 양심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 지혜는 뛰어난 분별력을 포함합니다. 인간의 판단능력이 자기 식으로 흘러간다면 그것은 원숭이만도 못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과학이 발달한 만큼 정신문명의 발달도 촉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는 이성이 의문시되는 시대, 이성이 위기에 처한 시대입니다. 정신문명이 건전하게 발달했더라면 과학도 지금처럼 저차원단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젯거리는 늘 多面體, 이 방향에서 보면 크게 보이고 다른 방향에서 보면 작게 보입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전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문젯거리는 다면체적인 성격을 띠며, '다른 방법이 없다'는 태도는 있을 수 없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일이 갑자기 장애를 만나면 필요 이상 곤란한 표정을 짓거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면역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결방법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문제가 본인에게는 매우 중대해서 생명을 빼앗길 정도의 충격을 받을지 모르나, 같은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쓸 필요도 없는 사소한 문제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를 어느 측면에서 보는가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문젯거리는 늘 다면체의 성격을 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무제가 발생해도 놀라지 않습니다. 문제를 가장 손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보는 방식에 따라 문젯거리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충격을 받고 쓸데없이 당황하는 것보다 어디서부터 접근하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할 것입니다. 문젯거리는 다면체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보는 의견이 다를 수 있고 해결방식도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태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한테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보통사람은 학력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부자나 유명한 사람의 말만 듣습니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서도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한테서나 배울 수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한테서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배운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지난날의 경험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다 보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당연하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인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혹은 학력이 높은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들의 의견을 자신의 생각보다 중요시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직관을 경시하고 남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죠. 이것은 겸손하다기보다는 비굴한 태도이며 자기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동양식을 보입니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학력이 높은 사람들의 판단이 항상 옳았을까요. 오히려 전쟁이나 쓸데없는 마찰이 일어난 것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의 의견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니었나요.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한테서나 배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식견 있는 사람들은 물론,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냈던 뉴턴과 같이 삼라만상까지 스승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현대는 정보사회이므로 어리석어서는 정보수집도 못할 것이고 평범해서는 정보수집에만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기 위해서 지혜로운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배웁시다. 사람은 논리에 근거해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관계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움직일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마음이 있어서 감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감정의 미묘한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무엇에 감동 받고 삶의 의욕을 갖게 되며, 어떤 일에 분노해서 의욕을 상실하는 것일까? 또 어떤 말에 공감하고 반발하는 것일까? 인간감정의 미묘한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단지 지능이 높아서 만은 아니며, 마음이 있어서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다른 점입니다. 경주마가 騎手의 마음에 공감해서 열심히 달린다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에게 감명을 받아서 자기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려 노력합니다. '知'가 아니라 '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요. 어느 시대에나 이해관계에 밝은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사람은 이해를 초월하고 때로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고 단언해도 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척정신을 높이 사는 것은 감동 할 수 있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열심히 사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성원을 보내고 반드시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 소리가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그 손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전혀 다른 생각 없이 어떤 일에 전념하면 주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며 도움의 손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은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무언가 충고를 하고 싶어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주위에 반드시 있을 겁니다. 사물은 반드시 양면성을 띱니다. 일방적인 견해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신만이 아시기 때문이죠. 진실은 여러 표정을 짓고 있다. 인간은 소문 때문에 망설일 때가 많은 존재입니다. 치우친 정보만을 수집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나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에는 반드시 양면성이 있습니다. 惡에도 善이, 善에도 惡이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간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콩고의 밀림 속에 병원을 짓고 의료봉사와 전도활동에 전 생애를 바친 슈바이처 박사는 밀림의 성자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 박사는 문명사회로부터 설탕, 우유 등을 가져와 밀림에는 없던 백내장, 결핵 등의 질병을 만연시켰습니다. 선을 베풀었으나 나쁜 영향까지 동시에 초래한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평판이 어떨지라도 박사가 숨을 거두자 수천 명의 원주민들이 그의 묘지에 꽃을 바쳤다는 그 사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지요. 사람의 견해라는 것은 이런 것이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선이 다른 사람에게는 약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실한 모습이냐 하면 모두가 진실한 모습입니다. 진실은 여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일방적인 견해로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을 내릴 때는 그것과 다른 판단도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신밖에 모릅니다. 꿈이란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꿈은 현실세계의 계시입니다. 꿈으로부터 배우는 자세가 있으면 인생을 두 배로 즐길 수 있습니다. 꿈은 현실세계의 계시이며 장래로부터의 메시지이다. 꿈 중에서도 장래에 관한 꿈을 豫知夢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칼 융'이 이런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하는데 그는 유럽대륙 전체가 피투성이가 되는 불길한 꿈을 여러 번 꾸고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고 고민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융은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친구의 사망과 같이 자기 주변에서 생길 일에 관해서도 여러 번 예지몽을 꾸었습니다. 융이 '꿈이야말로 생활의 안내자이며 꿈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고 말한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를 말합니다. 선입관이 없는 세계가 암시하는 바를 순순히 배우면 우리의 미래도 열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사람을 꿈속에서 죽였다고 합시다. 꿈속에서는 현실과의 경계선이 없으므로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흥분하고 있을 것입니다. 죽이고 낫 '큰 일을 하고 말았다'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잠이 깨어서는 '꿈이어서 다행'이라며 안심할 것입니다. 꿈은 현실세계의 계시입니다. 꿈의 교훈을 잊지 않으면 범죄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꿈은 장래로부터의 메시지이며, 현실생활의 예습이고 복습인 것입니다. 잠자는 시간마저도 유익하게 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역경은 삶에 강력한 활력을 제공합니다. 빚을 진 덕분에 일이 잘 되어 사회에 유익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빚도 일종의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새겨 대책을 생각하고 노력한다. 의욕을 불러 일으키며 정열이 불타오르는 도전. 인간행동의 기폭제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에서 시작하면 무순 일이든 적극적으로 합니다. 싸움닭을 훈련시킬 때 조련사는 자기 닭에게 본시합에 나갈 때까지 약한 상대하고만 연습시합을 시켜 승리만을 가르칩니다. 패배를 모르는 닭은 자신만만해지고 더욱 강해져 어떤 강적을 만나도 기가 꺾이지 않지만,한 번 진 닭은 두 번 다시 못 쓰게 됩니다. 힘의 근원인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한 번 지면 자신감을 잃게 되지만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새겨 대책을 생각하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감을 회복해 재도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제 자신감의 반대편에 있는 열등감(콤플렉스)이 원동력이요, 활력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랐으므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있거나,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엄청난 일을 하는 등 역경이 큰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은 다른 세상이 아닙니다. 이승과 저승은 그림자처럼 함께 붙어 있는 동반자입니다. 死後 세계를 염두에 두고 살아 간다면 현세는 보다 더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또 하나의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 '영혼 따위를 생각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혼을 믿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인도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來世에 왕족으로 환생할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후 세계를 염두에 두는 일은 전혀 무익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유익한 가치관을 제공합니다. 만일 사후 세계에 극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인간은 보다 더 이 세상을 풍요롭게 살게 될 것이며,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악덕이 횡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육체가 사라지는 것일 뿐, 영혼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육체는 이승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3차원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즉 상하, 전후, 좌우의 구별이 있는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삶은 초, 분, 시, 일, 주, 월, 년이라는 단위로 이루어지고 행동은 모두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일정 기간 살다가 죽습니다. 前生, 現世, 來世로 이어지는 輪廻는 저승에서도 거듭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은 또 하나의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저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저승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벗을 때 본래의 마음, 기억, 인격, 영혼이 나타납니다.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기 전의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랍니다. 저승은 본적지이고 이승은 현주소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인생이나, 일이나, 가정에서나 방침이 필요합니다. 방침은 배의 나침반과 같은 것, '동생을 구박해서는 안 된다' '밥을 더 달래고 남겨서는 안 된다'등 어린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단순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삶의 차원이 달라지면 삶의 목적도 바뀐다. 인생에 명확한 목적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는 어떻게 다를까요. 목적 있는 인생은 현실이 아무리 목적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서히 그 목적 실현을 향해 나아가지만, 목적 없는 인생은 그렇지 못합니다. 목적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나침반도 없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아, 거친 세파 속에서 헛되이 방황만 할 뿐이고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는 물론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인생의 나침반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한상 궤도수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차원이 달라지면 삶의 목적도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벌 생각이었는데 어느 틈에 사회활동이나 영적수행에 눈뜰지 모릅니다.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간단한 방침을 세워서 실천해 나가는 것이 결국 결실을 얻게 됩니다. 이런 방침은 인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을 할 때나 가정생활에서도 중요합니다. 교육방침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야단맞겠는데', '그러면 안 되지' 하고 어린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야 합니다. 원칙 없이 어떤 때는 야단치고 어떤 때는 아무 말도 안 한다면 어린이는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모두 불행해질 것입니다. 투입과 산출, 이 세상에서 투입과 산출이 똑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어느 한쪽이 많게 마련입니다. 언제나 양자는 불균형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회는 평등해야 하지만 성과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현대에 이르러 세상에 여러 가지 차별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지나친 평등주의가 널리 퍼진 것 같습니다. 선진국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특히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보다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평등의 의미를 확대하여 능력의 차이를 무시하고 평등하게 분배하는 制度를 수립한 나라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국민이 이런 制度에 만족하고 있는 한 그 나라는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회는 평등해야 하지만 성과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정당한 代價를 부여하는 制度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이 활력을 잃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투임과 산출이 반드시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한쪽이 다른 쪽보다 크거나 작은 것이 보통입니다. 1루피를 넣으면 반드시 커피 한 잔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매우 불평등한 것입니다. 투입과 산출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작은 투자로 큰 이익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행운이 따르면 큰 성공을 얻을 수 있기에 인생은 자극적인 것입니다. 삶은 예측할 수 업으므로 더욱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