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콘서트홀, 숲에서 마주한 고요의 순간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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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5-06-14 09:20 조회33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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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 모습. 연합뉴스
오대산 월정사, 천년 고찰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한 전나무 숲은 녹색 콘서트홀과 같았다.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수백 년 수령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소란스런 세상은 저만치 물러나고 깊이 모를 고요가 온몸을 감쌌다. 햇살은 금빛 가루를 흩뿌리듯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고 발밑에선 흙과 낙엽이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두런거렸다.
전나무 숲에선 귀를 닫아도 들리는 소리, 눈을 감아도 보이는 풍경이 있다. 바람이 연주하는 숲의 교향곡은 문명의 모터 소리가 잦아든 정적 속에 마주하는 내면의 목소리인 듯 싶었다. 숲길을 천천히 걷는 동안 문득 생각한다. 음악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인간은 왜, 무엇을 표현하려 소리를 엮기 시작했을까.
태초에 음악은 무언가를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인간이 의미 있는 소리를 짓기 노력했을 때, 이 모방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 대상은 자연이었다. 비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 천둥이 산을 울리는 소리, 바람이 풀을 스치는 소리는 표현의 본능을 깨우는 원형적 리듬이었다. 음악의 씨앗은 이처럼 자연의 소리를 기억에 보존하고, 고유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려는 욕구에서 발아됐다. 때론 자연보다 더 아름답게, 때론 더 거칠고 혼란스럽게, 음악 속엔 언제나 자연을 닮고자 하는 열망이 숨 쉬고 있었다.
시인이 사전에서 자신만의 시어를 고르듯, 작곡가는 자연에서 음의 재료를 고른다. 인상주의 음악의 거장 드뷔시(C.Debussy)는 예술가의 사명을 "자연에 새겨진 음악의 해독"이라 주장했다. 평범한 작곡가는 자신의 감정이나 이야기를 기술적으로 드러내지만, 진정한 천재는 자연과 우주의 신비로운 울림을 해독해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에겐 반짝이는 햇살, 일렁이는 물결, 속삭이는 바람 등 자연 그 자체가 완성된 악보여서, 자신만의 음악 언어로 섬세히 번역했다.
자연은 음악가에게 창조의 원동력이자 근원적 스승과도 같다. 도시 소음을 떠나 숲으로 발길을 들여놓을 때 섬세한 청각이 살아난다.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갇혔던 감각들이 자연이 연주하는 미세한 음향들로 치유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수백 년을 뻗어 올린 전나무들이 바람과 함께 연주하는 교향곡을 듣다 보면, 경쟁과 소음으로 지친 영혼이 신선하고 맑아진다. 자연과 음악은 시공을 초월하는 가장 순수하고도 강력한 울림이다. 당신의 전나무 숲은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가. 자연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숲의 속삭임에 음악의 첫 질문이 스며있다.
한국일보/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309430001124?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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