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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경]삶의 고통으로부터 함께 여는 희망 (강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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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6-09-15 09:03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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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 지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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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 지철스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처’

현대사회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지식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짙은 마음의 병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2003년부터 자살률 1위 국가이다. 날로 심각해지는 알코올, 도박 등의 중독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도 더 이상은 마약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2030 청년세대가 전체 마약의 60%에 달하는 현실의 문제는 진정 국가적 위기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회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대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파괴하는 중독의 늪에 빠지는 것일까?

 불교의 연기(緣起)와 사성제(四聖諦)의 지혜는 이 비극적인 사회 현상을 깊이 있게 진단하고, 치유의 방향을 제시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자살과 중독은 겉보기엔 다른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다. 바로 ‘고통(苦)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자살이 모든 고통에서 끝날 것이라는 뼈아픈 착각을 한다. 초기경전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구멍 난 나무판자를 만나는 것)에 비유할 만큼 기적적이고 소중한 인연으로 본다.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인 불살생(不殺生)을 스스로에게 범하는 심각한 폭력적 행위이지만 불교는 자살을 단순히 도덕적 죄악으로만 단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극심한 고통과 더불어 안타까운 어리석음(無明)의 상황을 진실된 자비의 눈으로 본다. 안타까운 현실은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은 죽음이 현재 고통의 소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불교의 윤회관은 육체의 죽음이 곧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삶을 단절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고통(業·업)을 다음 생으로 고스란히 이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즉, 자살은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합리적으로 직시할 수 있다면 일어나지 않을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고통의 그늘에서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중독은 갈증(고통)을 해소하려 바닷물(고통)을 들이켜는 행위이다.

중독은 현대인들이 스트레스, 공허함, 불안이라는 고통을 잊기 위해 술, 약물, 혹은 쾌락적인 행위에 의존함으로서 일어나는데 불교는 이를 ‘갈애(渴愛)‘라 한다.

불교의 불음주(不飮酒)는 단순히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지혜를 잃고 무명(無明)이 일어나는 것을 금기하는 것으로 우리의 맑은 정신을 흐리게 하고 방일(放逸)하게 만드는 중독성 물질과 행위를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중독은 일시적인 쾌락과 혼미를 통해 고통을 잠시 가려주고 고도한 도파민 발생으로 약효가 떨어지면 더 큰 공허와 고통이 밀려온다. 이는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갈증은 심해지고 결국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중독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부의 자극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시도로 우리지 조심해야 하는 행위이다.

 치유를 위한 불교의 제언으로는 관조(觀照)와 자비(慈悲)가 있다. 과연 고통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불교는 도피가 아닌 ‘알아차림(사띠, sati)‘을 통한 관조를 권한다.

중독의 행위들이 순간적인 도파민을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림으로 관조하여 외부가 요인이 아닌 내면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자살과 중독에 빠진 이들의 마음속에는 깊은 자기혐오와 자책 등 부정적인 부분들이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말씀하시며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자신’이며‘법’(法, 가르침)이라 말씀하셨다. 자신의 상처를 책망하는 대신 아파하는 스스로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자신에 대한 관조와 자비가 치유의 출발점이다.

 고통의 수용과 무상(無常)의 통찰을 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을 밀어내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은 늪에 빠진다. 불교의 명상은 내면에 일어나는 불안, 우울, 충동을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도록 돕는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도 결국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연기·緣起)임을 깨달을 때, 스스로 자살이나 중독이라는 안타까운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개인의 고통과 문제는 결코 개인만의 잘못과 책임이 아니다. 화엄경(華嚴經)의 인드라망(因陀羅網, Indrajāla)처럼 우주 만물은 ‘상호 연결성’과 ‘상호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즉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타인의 절망은 곧 사회 전체의 절망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이들을 비난하거나 고립시키는 대신,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는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따뜻한 사회적 안전망과 치유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자살과 중독은 벼랑 끝에 선 이들이 보내는 절박한 구조 요청이다. 거짓된 도피처에 의존하려는 그들의 손을 이제는 우리와 사회가 잡아주어야 한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지혜, 그리고 스스로와 타인을 보듬는 자비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며, 사회 전체가 커다란 돌봄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먼저 실천 방안은 일상 속 ‘작은 관심’의 회복이다. 타인의 고통,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귀 기울여 주는 ‘잠시’의 시간이 그들에게는 긴 어둠을 헤쳐 나가는 구원이 빛이 될 것이다.


강원일보

출처 : https://www.kwnews.co.kr/article/2026090150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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