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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오대산 월정사 주지 퇴우 정념 스님 (월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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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6-07-21 09:04 조회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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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오대산 월정사 주지 퇴우 정념 스님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승인 2026.07.20 09:36
  •  호수 202608

“AI는 사람의 번뇌를 없애지 못해”

⊙ “기계는 전원을 끄면 멈추지만, 인간은 번뇌의 전원을 스스로 꺼야”
⊙ “AI가 발전해도 깨달음만큼은 흉내 낼 수 없어”
⊙ “AI는 인간 業을 먹고 자라는 거울… AI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 미래를 향한 개문발차… “먼저 출발한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의 손을 잡아 줘야”
⊙ “나와 너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세상은 ‘한 송이 꽃’”

退宇 正念

1956년생. 1980년 탄허 큰스님의 수제자인 만화(萬化) 희찬(喜贊) 스님을 은사로 출가, 중앙승가대 졸업 / 중앙승가대 총동문회장, 동국대 이사, 불교TV 이사, 경실련 공동대표, 오대산 상원사 주지 역임. 現 월정사 주지 /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걷는 퇴우 정념 스님. 사진=조선DB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걷는 퇴우 정념 스님. 사진=조선DB

“AI가 발전해도 깨달음만큼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짙은 눈썹이었다. 스님을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짝이는 머리보다도 검고 짙은 눈썹이었다. 그 아래로 형형한 눈빛이 마음을 꿰뚫을 듯 강렬하게 빛났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자가 먼저 물었다.

“몸 잘 쓰는 것도 결국 마음 잘 쓰는 일”

눈썹은 염색하신 겁니까?

“(웃으며) 아닙니다. 염색한 건 아니에요. 흰 눈썹도 있고 검은 눈썹도 있고 그냥 자연 그대로입니다.”

담백한 대답이었다. 꾸밈없는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행자의 태도가 배어 있었다. ‘AI 시대의 인간다움’을 묻기 위해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주지 퇴우 정념(退宇 正念)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인터뷰에 앞서 자신의 저서 《퇴우 정념, 시대를 깨우다》(민족사, 2026년)를 건넸다. 목차만 훑어보아도 이번 인터뷰가 단순히 AI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AI 시대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묻는 대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정념 스님은 수행뿐 아니라 무술 수련도 오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께서는 문(文)과 무(武)를 함께 갖춘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무술도 오래 수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에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할 것은 없습니다.(웃음) 젊었을 때 이것저것 배우기는 했지만 지금은 요가를 꾸준히 합니다. 몸을 단련하려는 목적만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니까요. 몸을 잘 쓰는 것도 결국 마음을 잘 쓰는 일입니다. 수행도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스님의 말은 불교의 ‘신심일여(身心一如)’,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수행관을 함축한다. 세수(世壽)로 고희(古稀)를 맞은 스님께 물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정정해 보이십니다.

“건강이야 나이를 이길 수는 없지요.

나이 따라 조금씩 내리막길을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습니다.(웃음) 몸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요가에서도 ‘몸은 마음의 거친 표현이고, 마음은 몸의 섬세한 표현’이라고 하지요.”

두려움에 대해서도 물었다.

퇴우 정념 스님의 저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스님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퇴우 정념 스님의 저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스님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최근 정념 스님이 펴낸 저서 《퇴우 정념, 시대를 깨우다》 (민족사, 2026년).
최근 정념 스님이 펴낸 저서 《퇴우 정념, 시대를 깨우다》 (민족사, 2026년).

“문도 잘 잠그지 않는다”

스님도 두려울 때가 있습니까?

“그럼요. 산중에 있다고 세상하고 떨어져 사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세상 이야기를 다 전해 줍니다. 물론 산중은 변화가 빠른 곳은 아닙니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고요. 그렇다고 세상 변화와 등을 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바뀌면 불교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문화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저는 오래된 불교 전통 속에서 살아왔지만 이상하게 과거보다 미래가 더 궁금해요. AI가 세상을 어디까지 바꿀지, 그 속에서 불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늘 관심 있게 보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평소 가톨릭 소식을 챙겨 보는 기자는 얼마 전 교황 레오 14세가 AI 시대를 맞아 ‘바벨탑을 세울 것인가, 새로운 예루살렘을 세울 것인가를 분별할 용기’를 말한 것을 접했다. 공교롭게도 스님의 책 《퇴우 정념, 시대를 깨우다》에도 ‘기술의 쓰나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묻는 용기’라는 문장이 있었다. 종교는 달라도 ‘용기(勇氣)’라는 단어가 묘하게 겹쳤다.

퇴우 정념 스님은 2024년 9월 멕시코 누에보레온주 몬테레이(Monterrey)에서 열린 제19회 노벨평화상 수상자 월드 서밋에 참석해 ‘평화와 AI 윤리(Peace and AI Ethics)’를 주제로 발표했다. 스님은 “AI를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평화에도, 갈등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퇴우 정념 스님은 2024년 9월 멕시코 누에보레온주 몬테레이(Monterrey)에서 열린 제19회 노벨평화상 수상자 월드 서밋에 참석해 ‘평화와 AI 윤리(Peace and AI Ethics)’를 주제로 발표했다. 스님은 “AI를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평화에도, 갈등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멈춰 서서 묻는 용기’

종교는 다르지만 ‘용기’라는 표현이 참 닮았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AI도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쓰는 거잖아요.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습니다. AI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 쓰일 수도 있지만, 탐욕과 군사 경쟁을 위해 쓰이면 얼마든지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보다 인간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말하는 ‘멈춰 서서 묻는 용기’입니다. 2년 전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모임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즉 탐·진·치(貪瞋癡)를 해결하지 못하면 AI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고요. AI 시대일수록 기술보다 먼저 인간을 돌아봐야 합니다.”

“AI시대, 더 고독하고 외로워질 수도”

AI는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문명 대전환이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결국 기술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석기시대가 있었고 산업혁명이 있었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거쳐 이제 AI 시대로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양자 컴퓨터도 발전하고 생명공학도 훨씬 더 앞서 갈 겁니다. 난치병도 치료하고 노화도 늦추는 시대가 오겠지요. 인간이 꿈꾸던 일들이 하나둘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행복과 평화까지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AI는 사람을 편리하게는 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삶의 의미까지 대신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끼리 얼굴 마주하며 관계를 맺고 인성을 키우는 문화는 더 줄어들 수 있습니다. AI 시대일수록 사람은 더 외롭고 더 고독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행복은 결국 사람이 스스로 찾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AI는 초연결 사회를 만들겠지요. 그런데 연결이 많다고 해서 마음까지 연결되는 건 아닙니다. 앞으로는 AI가 지식도 알려 주고, 상담도 해 주고, 판단도 도와줄 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이해하는 힘은 오히려 약해질 수도 있어요.”

불교에서는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분별심에서 찾습니다. 분별은 원래 생존을 위해 생긴 능력이에요. 무엇이 위험한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판단하면서 인간은 살아남았지요. 그런데 그 분별이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비교하게 되고, 선입견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고, 불안과 강박도 거기서 시작됩니다. 좋다 나쁘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옳다 그르다… 이렇게 끊임없이 나누다 보면 결국 자기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수행은 분별을 더 잘하는 훈련이 아닙니다. 분별을 조금씩 내려놓는 과정이에요. 마음을 비우고 들여다보다 보면 분별이 지혜로 바뀝니다. 그때 비로소 집착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요.”

AI와 기계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경지

AI를 보면 기계가 신통력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몇 초 만에 전 세계 정보를 찾아 오고, 내가 좋아할 만한 것도 먼저 추천해 주니까요.

정말 신통력을 부리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육신통(六神通)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얻는 여섯 가지 능력입니다.

재미있는 건 그 가운데 다섯 가지는 지금 AI와 과학기술이 거의 구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멀리 보는 천안통(天眼通) 은 인공위성과 드론이 대신하고, 멀리 듣는 천이통(天耳通)은 스마트폰과 통신 기술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 마음을 읽는 타심통(他心通)도 AI가 데이터를 분석해 상당 부분 흉내 내고 있지요. 과거를 기억하는 숙명통(宿命通)은 빅데이터가 하고, 원하는 곳에 나타나는 신족통(神足通)도 메타버스와 디지털 기술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행자가 평생 정진해야 얻는다고 했던 능력들을 이제는 기계가 어느 정도 해내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대인은 과거보다 훨씬 행복해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웃음) 그렇지 않잖아요. 모든 걸 보고, 듣고, 알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더 불안해하고 더 외로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에서는 오신통을 아무리 얻어도 그것은 결국 ‘술(術)’이라고 봅니다. 기술이지요. 기술은 삶을 편리하게는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마음속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까지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히 똑똑한 기술이지만 사람의 번뇌를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있습니다. 바로 여섯 번째 신통인 누진통(漏盡通)입니다.”

‘누’는 번뇌가 틈새로 새어 나온다는 뜻이고, ‘진’은 그것이 완전히 소멸하여 말라 버렸다는 뜻이다. 누진통은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누진통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이 다 녹아 없어지고,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경지입니다. AI는 계산도 잘하고 기억도 잘하고 분석도 잘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누진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진통은 데이터가 아니라 수행의 영역입니다.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깨달음만큼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왜 AI는 누진통에 이를 수 없습니까?

“AI는 언어를 바탕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언어라는 것은 원래 나와 너를 나누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분별에서 시작됩니다. AI는 그 분별을 아주 잘합니다. 그래서 분석도 잘하고 비교도 잘하지요. 하지만 깨달음은 그 분별을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언어 이전의 자리라고 할까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도 하고,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합니다. 그 자리는 계산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AI는 인간의 業을 먹고 자라는 거울”

그렇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까?

“어머니가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 오랜 수행 끝에 찾아오는 고요함, 죽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절실함… 이런 것은 데이터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AI는 그럴듯한 대답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있는 언어를 조합하는 것이죠. 스스로 삶을 살아 내며 존재를 묻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AI 시대일수록 수행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는 전원을 끄면 멈추지만, 인간은 번뇌의 전원을 스스로 끄는 순간 비로소 자기 안의 맑은 거울을 만나게 됩니다.”

AI가 스스로 생각하고 가치관까지 만드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게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오해입니다. AI가 스스로 가치관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AI는 인간이 남긴 데이터를 배우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끊임없이 학습하는 것이지요. AI에게는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없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인간이 남긴 흔적을 배우고 다시 보여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AI가 배우는 데이터를 불교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몸으로 짓는 업(業), 말로 짓는 업, 마음으로 짓는 업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이 씨앗처럼 쌓이지요. 그 씨앗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깊은 의식 속에 저장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쏟아내는 모든 말, 모든 선택, 모든 반응이 AI라는 거울에 새겨지고, 그 거울은 그것을 무한히 증폭해 세상에 되돌려 보냅니다. 어떻게 보면 AI는 인류가 함께 만들어 가는 거대한 기억 창고이자 거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퇴우 정념 스님은 “‘신심일여(身心一如)’,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른쪽은 우원식 전 국회의장.
퇴우 정념 스님은 “‘신심일여(身心一如)’,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른쪽은 우원식 전 국회의장.

“인간이 AI에게 무엇을 가르쳤느냐가 더 중요”

거울이라는 표현이 참 인상적입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웃는 사람이 서면 웃는 얼굴을 비추고, 화난 사람이 서면 화난 얼굴을 비춥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그대로 배우고 그대로 돌려주죠. AI가 먼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을 비추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만약 AI가 탐욕과 분노 같은 데이터만 계속 배우면 어떻게 될까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을 보세요. 혐오와 분노는 금방 퍼지고, 자극적인 말일수록 더 많이 소비됩니다. AI는 그런 데이터를 계속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를 더 키우고 혐오를 더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AI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SF 영화 같은 디스토피아도 인간이 만든다는 말씀이군요.

“사람들은 기계가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AI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AI에게 무엇을 가르쳤느냐가 더 중요해요. 결국 AI는 인간을 닮아 갑니다. 디스토피아도 AI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입력한 탐욕과 폭력이 만들어 내는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희망도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뜻입니까?

“지금부터라도 다른 데이터를 만들면 됩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말,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동, 자연을 아끼는 실천…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이면 AI도 그런 세상을 배우게 됩니다. 협력과 연대, 사랑과 자비가 데이터가 된다면 AI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AI의 미래는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불교에서는 업이 숙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업은 언제든 새로 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미래를 바꿉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AI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 저는 그것이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수행이라고 생각해요.”

기술의 발전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생성형 인공지능과 유튜브, SNS 등 디지털 플랫폼이 정보 검색을 넘어 상담과 위로, 명상과 영성(靈性)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AI라는 거울 앞에서, 이 거대한 문명 전환 앞에서 정념 스님은 이제 종교의 역할을 되묻는다.

세계적으로 종교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유럽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세대가 종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의 언어만 반복해서는 지금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민에 답하기 어렵습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지금 이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월정사에서 정념 스님. 사진=조선DB
월정사에서 정념 스님. 사진=조선DB

‘마중물 리더십’

지금 불교계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미래 비전이 아쉽습니다. 종단 정책을 보면 대부분 당장 눈앞의 현안에 대응하는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AI를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고 있잖아요. 10년 뒤, 20년 뒤에도 불교가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것인지, 어떤 정신적 역할을 할 것인지, 그런 큰 그림을 함께 그려야 합니다. 1700년 불교 전통은 우리 자산입니다. 하지만 전통이 변화를 막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이렇게 해 왔다’는 말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마중물 리더십’을 강조하셨습니다.

“옛날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릴 때를 생각해 보세요. 깊은 우물이라도 먼저 마중물 한 바가지를 붓지 않으면 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리더도 그렇습니다. 결과를 다 확인한 뒤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자기 것을 내놓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먼저 배우고 먼저 해봐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이 조직 전체를 움직이게 합니다.”

결국 리더가 먼저 실패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조직에서는 아무도 새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리더가 먼저 도전하고, 실패도 해 보고,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면 구성원들도 용기를 얻습니다. ‘나도 해봐도 되겠구나’ ‘실패해도 괜찮구나’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조직은 살아납니다.”

결국 AI는 불교의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겠군요.

“저는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망치는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집을 부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망치가 아니라 망치를 쥔 사람입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을 넓히고, 불교의 지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데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중물 한 바가지가 깊은 우물의 물길을 열듯이, 한 사람의 용기 있는 리더가 종단의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교, ‘개문발차’의 정신으로”

AI 시대에는 경전도 다시 정리해야 합니까?

“그렇지요. 지금 동국대 같은 데서 불교 경전을 아카이브화하고 AI 데이터로 넣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AI 시대에는 경전도 다시 한 번 ‘재결집’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용어의 통일성부터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지요. 불교 1700년 역사 속에 쌓인 경전, 기록, 산중의 유무형 자산을 모두 데이터화해야 합니다.”

‘오픈소스 불교’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데이터라는 것은 이제 석유처럼 정제해서 누구나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불교의 경전과 사상, 문화유산을 오픈소스로 열어 놓으면 많은 문화예술인과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AI 시대에는 언어 장벽도 많이 사라지잖아요. 한국불교의 지혜를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퇴우 정념 스님은 이 시대를 두고 ‘개문발차(開門發車)의 시대’라고 했다. 예전에는 승객을 다 태우고 문을 닫은 뒤 출발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문을 열어 둔 채 출발부터 하고, 달리면서 사람을 태우는 시대다.

“저는 개문발차라는 말이 AI 시대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AI는 더하기의 속도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곱하기를 넘어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조금만 머뭇거리면 세상은 이미 저만큼 앞서 가 버려요. 그래서 ‘완벽하게 준비한 뒤 시작하자’는 생각은 자칫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족해도 먼저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교는 원래 신중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충분히 의논하고, 사부대중의 뜻을 모으고, 하나하나 점검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AI 시대에는 그 장점이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산이 다 마련되면 하자’ ‘시스템이 완성되면 시작하자’ ‘교육을 다 마친 뒤 도입하자’… 듣기에는 신중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기술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아요.”

일단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AI도 직접 써 보고, 실패도 해 보고, 부족하면 또 고쳐 가면 됩니다.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배움이 있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는 배움도 없습니다.”


월정사 단기출가학교

20년간 3000명 찾은 ‘마음의 出家’

2004년 퇴우 정념 스님이 문을 연 월정사 단기출가학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국내 최초의 본격 출가 체험 프로그램이다. 프랑스 틱낫한 스님의 수행 공동체 ‘플럼 빌리지’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으며, 단순한 템플스테이가 아니라 출가 정신을 현대인의 삶 속에서 체험하도록 기획됐다. 종교와 직업,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 대학생과 직장인, 주부는 물론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도 꾸준히 찾고 있다.

수행은 결코 가볍지 않다. 참가자들은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예불과 참선, 108배를 하고, 묵언과 발우공양, 삼보일배, 오후 불식, 3000배 철야정진 등을 수행한다. 휴대전화와 TV, 신문 등 외부와의 접촉도 끊고 오롯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다.

가장 상징적인 의식은 삭발이다. 정념 스님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습관과 집착을 내려놓겠다는 결심”이라고 설명한다. 밥알 하나도 남기지 않는 발우공양 역시 단기출가학교를 대표하는 수행이다. 많은 참가자들이 “쌀 한 톨이 이렇게 귀한 줄 처음 알았다”고 말할 만큼 음식과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기회를 얻는다.

지난 20여 년 동안 단기출가학교를 거쳐 간 사람은 30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10분의 1에 달하는 약 300명이 실제 출가의 길을 택했고, 나머지는 각자의 삶터로 돌아가 수행과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보살’로 살아가고 있다. 정념 스님은 “단기출가학교는 단순한 체험 프로그램이 아니라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수행의 여정”이라고 강조한다.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3000배 철야정진을 합니다. 그때부터는 남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지요.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끝까지 절을 올립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결국 내가 넘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저는 늘 ‘나를 이기지 못하면 세상 무엇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는 세족식을 합니다. 서로의 발을 씻겨 주면서 ‘당신이 부처님’이라고 인사를 나누지요. 한 달 수행을 마치고 산문을 나서는 분들의 얼굴은 처음과 전혀 다릅니다. 꼭 출가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 하나만 얻어도 저는 단기출가학교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념 스님에게 단기출가학교는 결국 ‘나를 만나는 시간’이자, 수행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또 하나의 수행처였다.


“망을 잇는 손 하나하나가 이 시대의 보살행”

그런데 그렇게 빨리 달리면 뒤처지는 사람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점 때문에 불교가 먼저 뛰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달리는 이유는 혼자 앞서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먼저 출발한 사람이 더 많은 열매를 얻었다면, 그 열매로 뒤에 오는 사람의 차비를 대신 내 주고 손을 잡아 끌어 줘야 합니다. 그것이 대승불교가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입니다. 혁신도 결국 자비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AI 시대에도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결국 자비라는 말씀이군요.

“기술은 빨라질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품는 마음은 그보다 더 깊어져야 합니다. 먼저 달리는 사람이 더 빨리 달려야 하는 이유도 결국 뒤에 오는 사람과 함께 가기 위해서입니다.”

월정사 일주문을 지나면 하늘로 곧게 뻗은 전나무들이 양옆으로 빽빽하게 도열해 방문객을 맞이한다. 수백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저마다 독립적으로 서 있다. 정념 스님은 “오대산의 전나무 숲이 천년을 견뎌 온 비결은 가장 강한 나무가 모든 것을 독식했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뿌리로 서로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알고리즘도, 더 빠른 칩도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땅속에 균사망처럼 뻗어 있어야 할 돌봄과 연대의 그물, 바로 그것을 다시 짜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숲을 살리듯, 보이지 않는 관계의 망(網)이 이 시대를 살립니다. 그 망을 잇는 손 하나하나가 이 시대의 보살행입니다.”

‘나와 너는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불교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출발해야 합니다. 달리면서 배우고, 넘어지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 불교는 1700년 동안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으며 늘 새로운 길을 열어 왔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님 말씀을 듣다 보니 AI 이야기가 결국 화엄사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스님은 “화엄은 ‘나와 너는 둘이 아니다’를 세상 전체로 확장한 철학”이라고 했다. “화엄은 세상을 연결해서 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와 남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나눕니다. 그런데 화엄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살리면서 존재합니다. 태양이 있어야 나무가 자라고, 물이 있어야 물고기가 살고, 별들도 서로의 중력 속에서 함께 우주를 이룹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의존하며, 하나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있다는 화엄경의 우주관인 ‘인드라망(Indra’s net)’을 의미하고 있었다. 오늘날 네트워크 사회를 설명하는 비유로도 자주 인용되는 인드라망은 AI 시대의 연결성과도 맥을 같이하는 듯했다. 이 대목에서 스님은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말을 했다. 이 단어를 듣자마자 머릿속이 밝아지는 듯했다.

“저는 세상을 ‘한 송이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미도 꽃이고, 민들레도 꽃이고, 패랭이꽃도 꽃입니다. 모양은 달라도 모두 같은 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국적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모두 같은 꽃입니다. ‘세계일화’는 결국 서로를 꽃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렇다면 AI가 몰고 올 디스토피아를 막는 것도 결국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이군요.

“기술은 방향을 정하지 않습니다. 방향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입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그 동체대비의 마음과, 서로를 한 송이 꽃으로 바라보는 화엄의 지혜가 있다면 AI도 사람을 살리는 문명이 될 것입니다. 저는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념(正念), ‘올바른 마음 챙김’, 영어로 ‘Right Mindfulness’라는 뜻의 법명을 가진 스님은 그렇게 AI 시대의 마음 챙김에 대한 명상을 이어 간다.

“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자의 자유’

올해 세수 일흔이신데요, 출가를 결심한 것이 인생을 바꾼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추측됩니다만… 그 지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출가했다는 것은 세속의 삶에서 수행자의 길로 방향을 바꾼 것이니까요. 사람마다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잖아요. 어떤 분은 일찍 만나고, 어떤 분은 늦게 만나고요. 저도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세속에서 명예를 좇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삶은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래 조금 내성적인 편이기도 했고, 격식에 매이고 세상의 기준에 끌려가는 삶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오히려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출가라는 선택을 하게 된 거지요.”

자유롭기 위해 출가를 하셨다… 그래서 지금 자유로우십니까?

“(웃음) 세상 누구나 인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인연이 때로는 무겁고, 사람을 묶어 두기도 하지요. 그런데 수행은 그 인연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인연도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 역시 책임이 있습니다. 대중을 섬겨야 하고, 전통도 이어 가야 하고, 맡은 소임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도 제게 주어진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인연이 있는 동안에는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 또 인연이 다하면 미련 없이 내려놓으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수행자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연결의식의 회복’

오늘 말씀을 듣다 보니 결국 수행이라는 것도 AI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해답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수행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연결의식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원래 다 연결되어 있는 존재예요. 그런데 그걸 잊고 살아갑니다. 왜 잊느냐. 분별심 때문이지요. 자꾸 나와 너를 나누고, 사람과 자연을 나누고, 내 것과 네 것을 나누고, 옳고 그름을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분리해서 바라보는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거예요. 수행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분리의식을 다시 관계의식으로, 연결의식으로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본래 하나였던 것을 다시 하나로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연결의식이 살아나면 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남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느껴지고, 사랑과 연민이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솟아나죠. 저는 그게 자비라고 생각해요. 결국 수행은 혼자 깨닫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분리의식을 연결의식으로 회복해서 사람과 사람을 다시 이어 주는 것, 그것이 수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에요.”

그런데 AI도 결국 ‘초연결’을 표방하지 않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는 연결과는 다른 겁니까?

“AI는 정보를 연결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지는 못합니다. 마음을 잇는 일은 결국 사람만 할 수 있어요. AI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많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경쟁보다 공존으로, 분리보다 연결로 나아가야 해요. 저는 그것이 수행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수행이고 명상의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2004년부터 여섯 차례 연임하며 조계종 통합종단 출범 이후 최장수 교구본사 주지로 기록된 정념 스님. 최근에는 종단 안팎에서 새로운 역할에 대한 기대와 요청이 감지된다.

 

‘불꽃 속에서 연꽃을 피운다’

마지막으로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불꽃 속에서 연꽃을 피운다’는 뜻이죠. 많은 분들이 수행은 조용한 산속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수행은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욕망과 분노, 어리석음이 들끓는 삶의 한가운데로 다시 들어와야 합니다. 그 불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연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수행입니다.

선불교에서도 수행자는 결국 저잣거리로 내려가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돕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참선만 해서 내 마음 하나 편안해지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수행은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나 하나의 해탈을 넘어 함께 건너가겠다는 대승(大乘)의 정신! 스님은 그 오래된 가르침을 이 시대의 언어로 다시 들려주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스님의 말이 오래 남았다. “수행은 연결의식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AI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연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다시 이어 붙이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월간조선/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출처 : https://month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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