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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三和寺) > 말사안내


월정사Odae mountain Woljeong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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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三和寺)

주지 : 임법 스님
전화 : 033- 534- 7661    팩스 : 033- 534- 7546
주소 : 강원 동해시 삼화로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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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眞侏)의 땅에 삼화사가 있으니, 이는 천년의 고찰이다. 사면이 모두 산인데, 서쪽 봉우리는 봉(鳳)이 춤추고 학(鶴)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고,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를 하고 있다.

그곳은 기이하고 절묘함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그 북쪽에 두타사이 있는데, 웅장하고 위엄 있는 기세가 오대산과 더불어 표리(表裏)를 이루고 있으며 시내가 있는데, 이 또한 천고에 뛰어난 경치가 되기에 족하다. 그래서 수령(守令)과 목백(牧伯)들이 바위나 반석에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마치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모여든 것과 같았고, 시인과 묵객들도 모두 계곡 아래서 시를 지어 잠깐 사이에 하나의 사원(詞源)을 열었다.

두타산의 웅장한 기세는 구불구불 내려오면서 꺽어지고 휘어져서 천변만화하여 남쪽으로 내달아 갈야산(葛夜山)이 되었는데, 옛날 실직군(悉直君) <<실직국(실직국)으로서 옛날 삼척지방에 있던 작은 나라, 변진(弁辰)의 하나의 도읍의 주산(主山)이었다.>> 한(漢)나라 영원(永元) 14년(102), 즉 신라 파사왕 23년 임인(壬寅)에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산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8,725척이었다. 후에 영락(永樂) 11년(1413), 즉 조선 태종 13년 계사(癸巳)에 다시 석축(石築)을 만들어 이곳에서 왜구의 침입을 피하였고, 또 풀로 만든 인형으로 신장상(神將像)을 만들어 남북 15리 절벽 사이에서 날려 군용(軍容)의 엄숙함을 보여 왜구들을 제압하니, 왜구들이 모두 백봉의 길로 도망하였다. 그런데 왜구들이 두연(豆淵)에서 빨래하고 있는 노파의 말에 따라 몰래 이기령(耳基嶺)을 넘어 중봉(中峰) <<중봉(中峰) : 택당(澤堂) 이식(李植, 1548~1647)의 유적이 남아있는 절인데, 한편에서는 단교암(斷橋庵)이라고도 한다.

이식은 조선 인조 때의 명신. 호는 택당이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 으로 들어가 공격하여 마침내 성을 함락시키고 의병을 도살하였다고 한다. ≪읍지(읍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화사는 오래 된 가람인데, 지금은 황폐하여 연대를 알 수 없다.

또 고적(古蹟)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조사(慈藏祖師), 자장율사(律師). 속성은 김(金)씨, 이름은 선종(善宗),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의 계율을 배우고 돌아와 오대산 월정사, 정선 정암사, 양산 통도사 등 수많은 절을 창건한 유명한 고승) 가 처음 당(唐)나라를 다녀온 후 우리나라의 오대산에 돌아와 성스러운 자취를 두루 유력하다가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黑璉臺, 지금의 삼화사)를 처음 창건했다, 그때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년)이고 당나라 정관(貞觀) 16년 임인(壬寅)이었다.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寶叱徒) 각 24방이었다. 뒷날 10리 서쪽 중대로 12방으로 지어서 옮겼다. 그러나 또 회양(?襄)의 재난으로 옛날 삼화사의 연대는 전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연대를 기록한 문헌도 거의가 증빙할 길이 없게 되었다. ≪읍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사(삼화사)의 남쪽 산악에는 예로부터 백련암(白蓮庵)이 있었다. 그 절을 간장암(看藏唵)이라고 하는데, 산 동쪽 기슭에 있다.

삼척부의 서쪽 40리 위에는 50개의 우물이 있는데, 웅덩이의 깊이가 얕고 깊으며 크고 작은 것이 50개인데, 이끼가 무성하고 물의 맑은 것을 신성한 우물로 여기다. 가물면 읍인들이 봄, 가을로 큰 제사를 올려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다. 본사(삼화사)에서 10리 떨어진 남쪽 기슭에는 고려조에서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이승휴(李承休, 1224~1300) <<고려 말기의 유명한 학자,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東安居士), 가리이씨(가리이씨)의 시조, 저서로는 ≪제왕운기(帝王韻紀)≫등의 유적지가 있다.>> 그는 충렬왕을 모시면서 간관(諫官)으로 있었는데, 세 번 간해도 받아 들여지지 않자, 떠나서 두타산 아래로 들어와 생을 마쳤다. 이승휴의 성품은 불교를 좋아하여 삼화사 부도에 가서 십 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고 농막을 지어 역편(易扁)스님에게 보시하면서 절 이름을 간장암(看藏庵)이라고 하였다. 그 산을 용계별업(龍溪別業)이라고 한다. 또 절벽 위에는 이학사(李學士)의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절 아래 삼화촌(三和村)에는 향로(鄕老)인 박지생(朴芝生)이 처음으로 원습에서 물을 끌어들여 도랑을 파서 천 경(頃)의 밭에 물을 대었는데, 이것을 박거(朴渠)라 한다. 또 동쪽 홍도리에는 최처사(崔處士)의 별업(別業)이 있다. 또 동쪽에는 취병산이 있다. 또한 금병산이 모두 최씨의 별업이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약사삼불(藥師三佛)이 서역으로부터 와서 주지하게 되는 ‘삼화(三和)’‘지상(池上)’‘궁방(宮房)’ 등은 현재적인 사명(寺明)이 정해진 뒤에 기록의 편의상 그렇게 표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더라도 3불(또는 3번)이 연화(蓮花)로써 산의 사우(四隅)에 분표(分標)했을 때 삼화사가 흑련대(북대)가 되고 있음을 볼때 이들의 중심사찰이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당시의 사명(寺名)은 산봉우리를 쫓아서 ‘삼공’(암)으로 불렸을 것이 가장 확실하다 하겠다. 그 증거로는 품일조사가 ‘삼공(三公)’이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삼공’(암)이었지만. 개별적으로는 청련대?백련대?흑련대로, 때로는 동대?서대?북대암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후 딱히 ‘삼화사(三和寺)’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된 것은 태조 왕건에 의해서였다.
 
‘삼화사’로 고쳐 부르게 된 내력에 대해서, “....대개 신인(神人)이 그 자리를 알려주었다. 조사(祖師)) 여기서는 범일조사를 가리킨 것이다. 가 그 터에 절을 지어 상서(祥瑞)를 기록하였으며, 신성왕(神聖王, 왕건-필자주)께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현재 남아 있는 중대(中臺)의 절터는 삼화사가 자리하기도 했고, 중대가 하재를 당했을 때 중대의 맨 아래쪽에 삼화사를 지음으로서 중대로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살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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