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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타사] 홍천 수타사 관세음보살상 (5월29일-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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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6-07 13:29 조회6,9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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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일반인 250명 동참 조성 

조선후기 불교 조각 연구 자료 

복장물에 유교 풍습 영향 남아 

홍천 수타사 관음보살상.

강원도 홍천 공작산 수타사가 자리잡은 곳은 생태숲으로 유명하다. ‘공작산 수타사 산소길’에서는 다양한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고, 수타사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자연은 극락세계를 방불케 한다. 지난해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말 강원도청의 요청으로 수타사를 방문했다. 원통보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절차를 진행키 위해서였다.

청주에서 홍천까지 가는 여정은 여러 고속도로를 두루 지나야 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들판에는 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길가에는 다가올 옥수수 축제를 알리는 알림판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수타사 입구에 도착하니 더운 날씨에도 생태숲을 찾아온 방문객들이 많아 계곡 물소리와 사람 소리가 어울려 화음을 자아냈다. 천년고찰 수타사는 아름다운 생태 공원과 사람이 어울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필자의 기억 속에는 홍천강과 물걸리사지 불상과 대좌 그리고 수타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학 시절 홍천강을 아름답게 그렸던 화가를 인사동 화랑에서 만났고, 대학원 시절 물걸리사지 불상과 수타사를 1박2일 일정으로 답사했던 추억이 있어서다. 

수타사 입구의 계곡을 지나면 사천왕이 있는 봉황문를 만나게 된다. 현재는 수리 중인 사천왕은 얼굴의 채색이 모두 벗겨져서 무서운 표정은 많이 누그러져 있다. 1676년에 조각승 여담스님이 사천왕상을 조성했으니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타사를 지켜 온 수호자다.

686년에 돌아가신 원효스님이 708년에 수타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설화에 가깝다. 창건 당시는 우적산(牛跡山) 일월사(日月寺)였으나 1530년(중종 25)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타사(水墮寺)는 공작산(孔雀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바로는 1568년(선조 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공작산 수타사가 되었다고 하지만, 1530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11년(순조 11)에는 절 이름의 한자를 물이 떨어진다는 ‘수타(水墮)’에서 아미타불의 한량없는 수명을 상징하는 ‘수타(壽陀)’로 바꾸었다. 수타사 계곡은 넓은 바위면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유난히 아름답고 시원하다. 아마도 이러한 자연 환경이 절 이름을 짓는데 반영되어 ‘수타사(水墮寺)’라 했다가, 19세기에 중생들이 바라는 영원한 목숨을 상징하는 ‘수타사(壽陀寺)’로 변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수타사의 주불전은 비로자나불상을 모신 대적광전인데 법당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부처님 머리 위에 있는 닫집에 그만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열 송이의 백련이 떠받치고 있는 천장에 매달린 ‘적멸궁(寂滅宮)’ 현판을 단 닫집은, 봉황과 비천 그리고 황룡으로 장엄되어 있다. 

관음보살상 복장물.

1992년에 신축된 원통보전은 주불전인 대적광전 향우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살림이 어렵던 조선시대에 건축된 대적광전보다 규모가 크다. 넓은 법당 불단 위에 46cm의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진 모습은 마치 어린 동생이 나이차 나는 큰 형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1992년에 새로 건축한 불전과 1758년에 조성되어 전해 내려온 관세음보살상은 세월을 사이에 두고 한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은 2015년 6월27일 개금을 하기 전에 복장 조사를 했는데, 이때 조성발원문 1점을 비롯해 후령통 1점, 주서(朱書) 다라니 18점, 복장 안을 메우는 빈 백지 4점 등이 발견되었다. 관세음보살상의 보관(寶冠)과 두 손은 따로 만들어졌고 나무로 만든 보관의 세부 장식은 금속재를 사용했다. 보관 중앙에는 관세음보살의 스승인 아미타불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화불(化佛) 아미타불인데 조선시대에 유행한 두 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권인(拳印)을 하고 있다. 18세기에 조성된 수타사 관세음보살상은 17세기 보살상에 비해 얼굴이 차지하는 비율이 커졌고 어깨와 무릎 폭은 좁아졌다. 얼굴은 타원형에서 네모난 형태로 바뀌었고, 미소를 머금어 입가에 힘을 준 표정은 17세기 보살상의 특징을 계승한 것이다. 

상투를 튼 관세음보살상의 머리칼은 귀 앞으로 흘러내려 어깨에까지 닿고 있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관음대사(觀音大士)’ 또는 두루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해서 ‘원통대사(圓通大士)’라고도 한다. 이런 연유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을 ‘관음전’ 또는 ‘원통보전’이라 한다. 명나라 때 사람인 사조제가 지은 수필집인 <오잡조>에는 관음보살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관음대사는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온갖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하니 이 또한 공자 이후의 맹자와 같다. 관음대사가 세상에 나타난 모습은 여러 가지인데 지금 여인상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기왕 ‘대사’라 했으니 어찌 여인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흔히 여성 불교신자를 ‘보살’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특히 관세음보살은 여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옛날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수타사 관세음보살상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가로 255.3cm, 세로 12.0cm 크기의 조성발원문에서 찾을 수 있다.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한 간절한 목적은 ‘이 보살상을 조성한 공덕으로 모든 중생이 극락의 연지에 왕생해 무량광불을 만나기를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사후 세계가 아니라 아미타불이 계신 극락의 연지에서 한없는 광명을 상징하는 아미타불의 또다른 이름인 무량광불을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있다. 

1758년 5월 수타사 옥수암에서는 관세음보살상 점안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는데 조성을 주도했던 증명을 비롯한 조각승과 화주 등 소임을 맡았던 스님은 13명이었고, 옥수암에는 10명의 스님이, 수타사에는 84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 기록을 통해 100여명의 스님이 옥수암과 수타사에 머물 정도로 사찰의 규모가 현재보다 컸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주자는 스님들과 일반인들로 모두 252명이 참여했고 46cm의 중소형 관세음보살 조성에 모두 359명이 동참했다. 이를 통해 1758년 수타사 옥수암 관세음보살 조성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의 지극한 염원이 담겨있는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시주자 가운데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새로운 불사 주체로 거사(居士)와 사당(舍堂)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인물들로 불전을 건축하거나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는데 적극적으로 시주에 동참한 이들이다.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해 조선 초 사찰이 통폐합되면서 비승비속의 남녀 불교신도들은 염불을 하며 조직을 이끌기도 했는데, 남자신도는 거사라 부르고 여자신도는 사당이라 했다. 조선후기인 17세기 후반이 되면 화주(化主)나 시주자로 거사와 사당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해, 18세기 이후가 되면 이들은 새로운 시주층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타사 관세음보살상 조성에도 시주자 명단에 ‘사당 보찬(舍堂 普贊)과 ‘거사 우신(居士 右信)’이 기록되어 있고, ‘거사 선학(居士 禪學)’도 등장한다.

수타사 대적광전 닫집.

수타사 관세음보살상 복장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후령통을 싼 겉종이이다. 증명을 맡은 스님이 조성 발원문에는 ‘증명 선교대선사 찬연(證明 禪敎大禪師 粲淵)’으로 기록되어 있고, 후령통을 싼 겉종이에는 붉은 글씨로 ‘증명 신 찬연(證明 臣 粲淵)’으로 쓰여져 있다. 18세기 이후에는 1736년에 조성한 제천 강천사 대세지보살상 복장물에서도 보듯이 불사를 증명하고 있는 스님을 ‘신(臣)’으로 표기한 것이 많은데, 이는 당시 유교의 풍습이 불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수타사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한 조각승은 두 명인데 수조각승은 순경(順瓊)이며, 차조각승은 덕순(德淳)이다. 수조각승 순경이 제작한 불상은 수타사 관세음보살좌상 이외에는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몇 가지 기록을 통해 그의 활동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7세기에는 조각승들이 그룹을 형성해 활발하게 불상을 조성한 것과 달리 수타사 관세음보살상은, 조각승의 활동이 위축되어 갔던 18세기 중엽 이후의 상황을 알려주는 조선후기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불교신문3301호/2017년5월31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기사원문보기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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